신화(Mythology)와 경제(Economy)

갈라치기 정치는 왜 해를 가릴까 – 라훼(Rahu)와 이준석, 혐오의 그림자

MythNomics 2025. 5. 2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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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3차 TV토론.
그날, 우리는 “이건 설마 생방송이겠지?” 싶은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준석 후보가 내뱉은 그 한마디, “여성의 성기에 젓가락을 꽂고 싶다고 말하면 혐오입니까?”

…네, 맞습니다. 혐오입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혐오도 아닙니다. 비하, 조롱, 갈라치기, 악마화까지 겹친 고급(?!) 혐오 세트였습니다.

라훼(Rahu) – 진영을 가르는 악마

힌두 신화 속에 라훼(Rahu)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아수라’, 즉 신들과 대립하는 종족이었죠.

어느 날, 신들은 ‘암리타’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의 음료를 만들어 마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라훼는 슬쩍 위장하고 그 줄에 끼어들었습니다.
암리타를 조금 입에 대는 순간, 태양신 수리야와 달의 여신 찬드라가 “얘, 쟤 정체 사기야!” 하고 외칩니다.

그 순간, 비슈누 신이 날아와 수두룩하게 베어버립니다.

하지만!
라훼는 이미 암리타를 한 모금 마신 상태.
그래서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 머리만 살아남은 ‘라훼’
  • 몸만 살아남은 ‘케투(Ketu)’

이 둘은 하늘을 떠돌며 자기를 들킨 태양과 달을 증오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태양과 달을 삼키며 복수를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식과 월식, 그게 바로 라훼의 복수극입니다.

혐오를 말하는 방식: 자기가 삼킨다

라훼는 태양과 달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다 실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증오하고, 갈라치며, 삼킵니다.

이준석 후보의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마치 혐오에 대한 합리적 토론인 척,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혐오입니까?”

이건 묻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정당화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혐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먹고 자랍니다.
갈라놓기 위한 ‘질문’인 거죠.

  • 성적 대상화된 여성
  • 조롱을 정당화하는 언어
  •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

그는 하늘을 가릅니다.
태양도, 달도, 여성도, 토론도 모두 그 입에 들어가고 맙니다.

라훼의 본질: “나는 쟤 편 아니야”라는 말로 세상을 나누는 존재

라훼가 갈라놓은 건 단지 태양과 달이 아닙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정의와 왜곡을 모두 삼키며 분열을 먹고 삽니다.

오늘날 갈라치기 정치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을 공격하는 이들의 논리는 늘 같습니다.

  • "난 여성혐오자가 아니야, 하지만…"
  • "그냥 예시였을 뿐이야"
  • "이건 합리적 문제제기야"

그리고 그 뒤에 남는 건 늘 똑같습니다.
분열, 조롱, 상처, 무너진 상식.

정치인의 자격이란 무엇인가

정치는 연극도, 쇼도 아닙니다.
그 자리는 말에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말을 통해 사람을 설득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 말로 공동체를 지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라훼는 머리는 있지만 몸이 없습니다.
판단력은 있지만 실천은 없는 존재,
말은 있지만 책임은 없는 존재,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라훼형 정치인’의 실체 아닐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해가 가리는 세상을 살아야 할까

라훼는 결국 신들에게 퇴출당했습니다.
그리고 일식과 월식은 잠깐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태양은 가려도 다시 뜹니다.
달은 삼켜져도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둠을 기억하며, 다시 밝아져야 합니다.

 

 말은 칼이자 거울이다

이준석의 발언은 실언이 아닙니다.
그는 말로서 혐오를 퍼뜨리고, 비하를 정당화하며, 갈등을 확산하고,
여성을 악마화하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질문의 탈을 쓴 갈라치기였고, 토론의 이름을 빌린 혐오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누군가의 존엄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화는 오래전부터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의 끝은 파국이라고.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언어의 윤리를 경고하는 경전이었습니다.

정치인은 말로 권력을 세우지만, 그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그 칼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갈라진 틈을 봉합하고, 혐오 대신 연대의 언어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신화를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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